연립 빌라 다세대주택 소유자 아파트청약 무주택 인정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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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세사기"사태로 빌라,연립주택시장이 초토화 되고 있는 와중에 빌라매매시장을 촉진시키는 정책일환으로 일정기준조건의  연립,단독,다세대등  비아파트 소유자가  청약시에 불이익이 없도록 청약시 무주택자로 인정하는 비아파트 요건 확대를 시행했다. 다세대 기사에 나온 예를 들면  서울에  사는 4인 가족의 세대주인 홍길동씨(48)는 7년 전 보유 빌라(다세대주택)를 처분한 뒤 전세로 거주하면서 인근에 신규 아파트가 나오면 청약에 도전하고 있지만 가점제로 인해 당첨이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청약 가점제상 무주택기간은 15년 이상일 때 만점(32점)이 주어지는데, 홍길동씨는 무주택 기간이 빌라 매각 이후 ‘7년 이상 ~8 년 이하’(16점)만 인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무주택으로 인정해주는 비아파트의 규모·가액 기준이 대폭 확대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홍길동씨가 7년 전 처분했던 빌라의 당시 공시가격은 3억원 수준이었기에, 이번 제도 개선으로 해당 빌라 보유 기간이 무주택 기간으로 바뀐 것이다. 정부가 지난해 ‘8·8 주택공급 대책’ 때 발표하고 관련 규칙 개정을 거쳐 최근 시행에 들어간 ‘무주택 인정 비아파트 요건’ 대폭 완화 조처가 새해 수도권 아파트 청약시장과 빌라 시장에 끼칠 영향이 주목된다.  청약 때 무주택으로 인정하는 비아파트 요건 확대를 뼈대로 한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 개정안이 24년12월18일 공포·시행에 들어간 뒤 서울에서도 곧 실제 적용을 앞두고 있다. 지난달 중순 이후 신규 분양이 없었던 서울에서는 이달 중 입주자 모집공고를 하는 단지부터 새 규정이 적용된다. 아파트청약 개선안은 단독·다가구주택, 연립·다세대주택, 도시형 생활주택 등 ‘비아파트 주택’ 소유자가 아파트를 청약할 때 불이익이 없도록 청약 시 무주택으로 인정하는 비아파트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종전에는 그 기준이 전용면적 60㎡ 이하, 수도권은 공시가격 1억6천만원 이하(지방 1억원)이었는데,...

미얀마 독립운동가,국부 아웅산장군 스토리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가, 정치가이자 미얀마의 국부이다. 존칭인 '보조 아웅 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보조'는 버마어로 '장군'이란 뜻이다. 또한 아웅 산 수 치의 아버지이다.

아웅산장군
아웅산 장군은 1915년2월13일 생이며,1947년7월19일 암살당했다.

아웅산 장군 스토리

1932년, 양곤대학에 입학하였으며, 4년 뒤인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1940년 영국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중국 하이난성에서 버마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후 일본의 도움을 받아 버마에 다시 돌아와 영국군과 싸웠다. 일본은 괴뢰정부인 버마국을 세우고 영국보다 더욱 가혹한 통치를 시행하여 버마인을 비롯한 인근 국가에서 동원해온 민간인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아웅 산은 30인의 동지와 함께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을 결성,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고 영국군이 버마를 재점령하자, 아웅 산은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애틀리-아웅 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버마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독립을 쟁취하기 전인 1947년 7월 19일, 아웅 산의 형[3]을 포함한 7인의 장관들과 함께 양곤 사무국 건물에서 임시 내각 회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아침에 군복을 입고 톰슨과 스텐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4명의 괴한이 지프를 타고 사무국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경호원들을 죽이고 회의장으로 난입, 총기를 난사하였다. 아웅 산을 비롯한 5명이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3명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이후 영국 식민정부는 임시 내각의 총리였던 우 소[4]를 비롯한 8명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고 체포, 버마 임시 대법원에 이들의 재판권을 넘겨주었다. 우 소는 억울함을 항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9명 모두 이듬해에 처형하였다.

그의 암살로 버마의 운명은 독립 이후부터 삐걱댔고, 이후 버마족과 카렌, 카친, , 친, 카미, 아라칸, 로힝야족 같은 소수민족들과 이념이 다른 정당간 내전이 끊이지 않게 되며,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혼란한 빈국으로 추락하고 만다. 독립 이후 버마의 굴곡진 역사에서 민족, 종교, 이념을 막론하고 모두가 존경하고 버마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아웅 산의 죽음은 제일 안타까운 순간. 만일 그가 죽지 않고 버마의 초대 대통령이나 혹은 초대 총리가 되었더라면 적어도 지금 같은 내전, 쿠데타에 크게 시달리지는 않았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아웅산은 버마족 출신이었지만 카렌, 샨, 카친 등 소수민족들에게도 관대하였으며, 팡롱 협약이라는 미얀마 내 소수종족들의 자치와 권익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었다.

버마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건 물론이거니와 버마 통합을 실현하려던 인물이었기에, 현 미얀마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군부조차도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그래서 딸인 아웅 산 수 치가 30년 넘게 미얀마 군부에게 대항하며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을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정권 시기에 겪은 탄압이 가택 연금으로 끝났던 것.

달리 말하자면 아무리 군부가 이끄는 독재 정권이라 한들 아웅 산의 후손을 함부로 탄압했다가는 그날로 정권이 무너질 수 있을만큼 아웅 산의 위상 자체가 최고존엄인 건데, 심지어 미국의 한 언론인이 미얀마에 취재 목적으로 입국해놓고는 아웅 산 수 치의 자택에 몰래 찾아가 인터뷰를 한 게 탄로나서 국외 추방 명령을 받아 공항으로 압송될 때 어느 여경이[5] 작은 목소리로 아웅 산 수 치의 안부를 물어봤다고.

아웅산장군가족1943년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 아웅 산 수 치가 딸이며, 본래 버마어에는 성이 따로 없지만 영국 유학을 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본인의 이름 '수 지' 앞에 붙여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외모도 판박이 수준에 가까울 만큼 닮은 편이라고 한다.

아웅산장군아내 킨치(1912.4.16.~ 1988.12.27)


암살 배후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사건이 터지기 직전, 아웅산을 향한 암살이 곧 진행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실제로 의심되는 반 아웅산 인사들의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아웅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회의장에 경호원 몇 명을 배치하는 것 외에는 전혀 대비가 없었다. 게다가 괴한들이 검문소를 통과할 때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기에 의혹이 커졌다. 또한 우 소가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증거가 부족했고, 그는 한평생 군대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아웅산을 암살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암살 사건 이후, 사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였지만, 대부분 알 수 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후일 BBC에서 왜 우 소가 암살범으로 지목되었는지 취재하였는데, 그가 암시장에서 영국군 하급 장교들을 통해서 무기를 구매하는 장면이 목격되어서 라는 것. 결국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에는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김재익 등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관료들이 죽으면서 알려졌다. 미얀마를 방문한 사절단이 외교상 관례에 따라 아웅산의 묘소를 참배하는데 이를 노리고 북한이 테러를 일으킨 것. 묘지는 테러 이후 오랫동안 폐쇄됐다가 최근인 2012년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됐다. 참고로 테러로 목조 건물이 박살난 뒤 돌로 다시 지어서 폭탄 테러 당시의 옛 모습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테러로 희생된 한국인 추모비도 있다. 양곤을 찾으면 99% 방문하는 슈웨다곤 파고다 북문 바로 앞에 있어서 들리기는 쉽다.(이상은 나무위키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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